그림자

깨어 있으면서도 꿈속으로 가려고 내자신을 죽인다. 꿈은 바로 어둠 뿐이었다. 공원으로 연결되는 그 좁다란 길, 그곳의 어둠 나는 빛을 피한다. 낮은 정말 끔찍하다. 모든 형태가 살아나서 아우성거리며 자기를 바라봐 달라고 울부짖는다. 정말 끔찍하다. 그래서 난 낮에 대한 기억을 스스로 지우는 능력을 나도 모르게 습득했다. 밤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고 싶다. 부적절함, 부정확함, 고요함, 죽어버린 인간들의 아우성… 밤의 푸른빛은 하늘이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매일 똑같은 그 짙은 밤이 계속된다. 우리의 삶이 끝나기도 전에 죽음은 우리의 곁에 와있었다. 살아 있으면서도 우리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너무 늦게 죽었다. 그 죽음과 함께 그때 부터 모든 것이 그 사람을 따라 죽어야만 했다. 그 사람에 의해서, 죽음은, 연쇄적으로, 우리의 만남 이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제 그 사람의 시체는 우리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모든 사건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고통이 밀려온다. 그 고통이 나를 사로잡고, 나를 빼앗아 가 버린다. 나는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까지 이른다. 한편으론 그 짧은 순간이 가장 편안한 시간일것이다. 나는 이제 사라지고 고통만이 남는다. 그것이 어떤 고통이었는지 나는 알수가 없다. 바로 어제의 고통인지, 몇년전의 고통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같은 고통인지도., 아무것도 알수가 없다. 나는 막연히 죽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죽음. 이 단어는 벌써 나의 삶과는 분리되지 않는 말이다. 항상 내곁에서 나의 손을 잡고 있지만 매일 항상 언제나 나는 잊어버린다. 나는 그 것을 바라본다. 눈을 감아도 그것이 보인다. 결코 사라지는 것은 없다. 모든것이 영원하다. 이런 불멸성은 내가 살아있을 때에만, 불멸한 것이 될까? 불멸성이 삶속에 있을때, 그것은 길게 사느냐 짧게 사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사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무엇인 것이다. 무, 텅빈, 그 어두운 무 속으로 모든것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mb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능력의 소재들이 불꽃처럼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태고의 혼돈 상태로 뒤엉켜 어지러이 맴돌고 있다. 잠재적인 가능성이 모든 구석에서 유혹의 눈길을 깜박이며, 우주가 온통 나를 유혹한다. 나는 순식간에 생성되고, 두 손을 불 속 깊이 집어넣는다. 그 속에는 바로 나를 의미 하는 하나의 것, 곧 나의 행위가 숨겨져 있어 나는 그것을 움켜 잡는다. 그순간! 심연의 위협은 어느새 사라지고 저 핵심 없는 다수의 것은 더이상 갖가지 빛깔로 노닐지 않는다. 거기에는 다만 두가지의 것, 즉 망상과 사명이 있을뿐이다. 밤하늘의 별처럼 외로운 저 얼굴이여! 아, 무감각한 이마위의 산 손가락이여! 아, 점점 사라져 가는 발소리여!

Hope

욕망이 조금이라도 만족되면 허탈감이 찾아온다. 욕망의 완벽한 실현은 있을수 없다. 다만 욕망의 만족으로 허덕이며 살아갈 뿐이다. 재앙은 바로 상상력이나 꿈을 방해하는 욕망의 실현일 것이다. 이 욕망의 실현은 기대를 낳고 그 기대의 노리개인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희망이라는 작은 등불이 아직 남아있다. 그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것이며 꿈꾸고 창조하려는 모든것이리라. 이 역동적인 의지로써… 단, 희망과 소망을 혼돈하지 않는 한에서…

Toilet

더러움을 싫어하는 현대인들, 하지만 더러움은 궁극적으로 사라질수 없기에, 어쩔수 없이 더러워져야 하는 구성원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그 더러운 구성원들을 위한 자리는 찾아볼수 없다. 인간모두는 그저 자신의 무가치함을 부인하고 싶어한다. 화장실 변기 처럼 평생 자기를 희생하여 타인의 더러움을 감추어주지만 화장실 변기를 침실로 들일 일은 절대 없다. 겉모습을 가장해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도 역경이 닥쳐오면 마찬가지로 겉모습인 동시에 상징이 된다. 우리의 이 피상적 모습은 그러한 예술의 겉모습과 가면보다 더 형편없는것이다. 저주받은 우리 인간들은 어쩔수 없이 형편없는 피상성에 매달릴수 밖에 없다. 깨끗한척하던 모든것은 곧 더러워지고 쓰레기 그자체가된다. 그 모두가 너무나 유행을 따르고 있어서 내일도 유행에 뒤지지 않을것이다. 그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착각하는 현실속에서…진리와의 접촉이 나에게 오류와 부정을 동시에 가르쳐주었다. 일시적이고 경박한 그 모순들을 증오하지 않을수 없게한다. 그러한 모순들은 더러움을 모방하고 있기때문이다. 분명히 그러한 것들의 성공은 진지한 것이 아니다. 매력적인 초연의 열광은 언제나 무가치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이미지들 그것들은 곧 소멸되어 버린다. 모든 이미지 소비속으로 그러나 한동안은 더럽지 않은척, 오류가 하나없이 깨끗한척 할것이다. 단지 돈을 벌고 호평을 누리는것이다.

허상

가장 명확하고 형태가 있는것이 영혼에 끼치는 영향과 가장 파악하기 힘들고 형태가 없는것이 영혼에 끼치는 영향이 같다는 점은 아무래도 알수 없는 사실이다. 억눌린 욕망의 회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치유? 이것도 불가능하다. 단지 더나은 이해를 위한 몸부림일것이다. 언제라도 눈을 감으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곁에 있다. 그렇지만 그들을 볼수는 없다. 그저 느낄수 있을 뿐이다. 죽음, 헤어짐 모두 영원한 이별은 될수 없다. 영원한 시간 속에서 아직도 그들을 만나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 되어지고 있다. 무엇이 나를 진정 자유롭게 해주는가?… 짧은 시간동안 모든 삶을… 더이상 무엇을 바랄것인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자기 자신의 기만일뿐이다. 인간이 철저하게 어리석은 짓을 할때는 항상 고귀한 동기가 있기때문이다. 모든 것을 인식하면서도 어떤 특정한 조건을 따지며, 그것 자체가 조건을 넘어선다는 어떤 진실성이라는 명분, 가짜명분, 그것이 바로 자기기만이다. 이세상 모두에게 상처주는 이 허황된 이미지들이여… 나의 눈앞에 있는 모든 이미지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낸 힘, 행위자… 이모든 자체성은 동일하다. 무상함이라는 그들의 영원한 속성이 동일하다.

돌 줍기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행복 마저도 잊을수 있는 길은 오직 관조적 삶이라는 믿음. 생각으로 깨닫는다는 건 모든걸 똑같이 보는것이리라. 욕망도, 이루지못할 욕망도, 생각에서 비롯되며 결국 저주받은 사람처럼 자의와는 상관없이 미친듯이 날뛰며 화내고 슬퍼하며 미움과 사랑… 그속에서, 그 미칠것같은 끌려다님, 산만한정신 속에서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Ricardo Reis 그리고 Vasudeva 처럼 그저 강을, 물의 흐름을 바라봄은 일종의 안정제를 그러나 필수적인… 강가에서 돌을 주으려고 집중하였을때, 보이는것은 수많은, 수만가지의 돌 뿐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그 자체밖에 볼수 없었으며, 돌을 주워 가방에 하나씩 담는 시간동안, 가방이 정확히 언제 무거워지는지 인식할수 없었다. 하나에 몰입한다면 그 순간 이 세상 모든것은 사라진다. 자유로움이란 수만가지, 삼라만상이 결국 단일하다는, 그 단일성의 세계를 알아차리는 것이리라. 인간 존재에 놓인 양극성… 사유와 감각, 정신과 욕망의 배후에서 탐구되는 단일성, 그것이 가장 힘들고 고귀하며, 어느 한쪽에 편중됨이 없음… 관조적 삶은 현실과의 불협화음으로 삶을 고통스럽게 이끌수도 있지만 이젠 내부와 마찬가지로 외부도 인정하며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현실 속에서도, 외부의 현상계가 내면의 세계와 모순되지 않고 내부와 외부가 신비적으로 합일됨을 목표로… 완전해지려면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Prayer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고통스러운 의식에 매 순간 깨어있을 수 있는가? 공허와 우울은 그곳으로 향하는 중요한 알아차림 일 것이다. 자, 다 함께 기도를 하자! 건강한 자들이 늘어놓는 억지 자유가 아닌 자유. 그것이 넘쳐 흐르는 그곳으로 향할 수 있도록… 그 어떤 회의주의자도 가보지 못한 그곳으로 가는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다만, 절망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절망감 없이 부처의 설교나 쇼펜하우어의 글을 읽은 적이 없다.”

Confabulation_1

오늘날 이미지의 생성과 소멸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모든 것이 넘쳐나고 남아도는 현대 문명의 풍요로움은 어떤 정형화된–이미지의 생성과 소멸의–반복과 기대감의 꿈을 현대인들에게 불어넣는다. 현대인들은 이 가상의 꿈을 꿀 수 있게 되자–마치 모든 것이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처럼 가까이 있는–모든 피조물에 대한 갈증은 더욱더 끔찍해진다. 이제 개인은 당연히 심지어는 즐겁게 사회가 약속하는 이미지 속으로 그들의 존재 자체를 던져버리고 정형화된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이 행위는 아마도 “하루 종일 바람 피할 장소 하나 없이 허허벌판에서 자기 자신들을 에워싸는 철조망을 치고 돌아오는 수용소의 죄수들”과 다르지 않으리라.

다른 점은 오직 현대인들은 자의적으로 결정하고 판단한다는 착각일 뿐이며 그것은 그들이 부르짖는 자유이다. 그들은 진정 자유를 생각해보았을까?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이 아니다. 다만 가끔만 사유하는데 사유 할 수 없는 것과 부딪혔을 때 그리고 그것을 피해갈 수 없을 때 비로소 사유를 시작한다”고 했다. 자유라는 것은 수많은 사람이 얘기했고 항상 중요시되는 주제이다. 또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인간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자유라는 관념이 부딪혀 깨지는 경험이 없다면 사실은 단 한 번도 자유에 대해서 사유를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순간 자신들이 직접 쌓아놓은 철조망에 갇혀서 끊임없이 이미지생성 때문에 고통을 받고있는 그들 자신을 보게 된다. 이제 그들의 관심은 이미지 소멸로 향한다. 조금이라도 존재를 가볍게 하려는 욕망이 높아지자 이제 사회는 이미지 소멸에 관한 상품이 쏟아져 나온다. 어떤 책임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우울증적 쾌락주의 상품들, 자연과 관련된 힐링을 가장한 기분전환 상품들… 하지만 행위의 근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미지 생성과 소멸 메커니즘의 덫에 걸려들어 이제 둘 중 하나도 멈출 수 없는 상황에서 생을 마감할것이다… 2001년 여기는 북경의 한복판 난 이제 고궁(故宫, Forbidden City)안으로 들어간다. 무더운 8월의 여름 햇살. 이 성안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고(자객이 숨지 못하게 하기 위함) 그저 똑같이 생긴 끝없이 펼쳐지는 마치 사막과도 같은 광경뿐이다. 이제 다시 뒤돌아 갈 수도 앞으로 갈 수도 없는 중간에서 난 멈춰버렸다. 숭고라는 감정의 상처는 순간 나타났다가 사려졌다. 이제 반복되는 건물들, 반복되는 행위, 반복되는 인간들, 반복되는 오감의 자극들, 반복되는 모든것들… 차이는 없고 반복만 되는 동일성만이 남아버린 세상… 난 구토와 현기증을 느낀다.

Letter_1

Dear, Darkness
Thank you for visiting me again today. When you come back, the pretentious outlines of the world disappear; instead a true picture appears. Also, the crazy rocking desire in my heart can slowly calm down. This moment is the happiest time for me. Thank you. In fact, I have been afraid of you for a long time. With a worry that everything I made would disappear in the dark… People I like would disappear in the dark… Most importantly, I was so afraid that the person who lives in my heart and the memories would disappear. So, when you came to me, I was too scared to look at you. I just wanted you to leave as soon as possible and just closed my eyes to try to sleep. However, now I am looking forward to seeing you again. Someday if you come back to me, please stay with me forever. Please promise me that you will erase everything and take back everything to be one again. Please promise me. Please.
jkk